발레에서는 스스로도 진짜와 가짜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과 인물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무용이든 문학이든 미술이든, 창조자가 자신의 예술이 현실보다 더 진실하다고 믿어야만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아름다움과 예술의 차이이기도 하다.

- 〈밤새들의 도시〉 중에서

우리는 늘 뭔가를 '이해'하려고 해. 세상에는 때때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까맣게 잊고 싶은 듯이.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원인과 결과를 도출하면 문제가 훨씬 단순해지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성숙한 사람이라면 알 거야. 모든 것을 원인과 결과로 도식화 할순 없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인과성의 회색 지대에 놓여 있는지도 몰라. 조금 이상한 공연을 봤어. 나쁜 의미가 아니라, 말로 완전히 붙들 수 없어서 더 오래 곱씹게 되는 이상함 말이야.

무대를 꽉 채운 9천 송이의 카네이션, 어디선가 은은하게 퍼지는 독특한 향기, 공연 중 등장하는 네 마리의 저먼 셰퍼드...... 나열하기만 해도 범상치 않은 이 무대는 독일의 무용단 '탄츠테아터 부퍼탈'의 공연 〈카네이션〉이야. 넓은 공연장 무대에 펼쳐진 카네이션들판은 압도되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답고 오묘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지. 이 공연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이 꽃밭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어. 25년 만에 한국에서 펼쳐지는 독일의 무용 대가 '피나 바우쉬'의 대표작이라는 것도, 그녀가 '탄츠테아터(Tanztheater)'라는 현대 무용 사조를 유럽에 단단하게 뿌리 내리도록 한 인물이라는 점도 모두 저 들판에 홀려 공연을 예매하고 난 뒤에 알게 되었지.

고전적인 무용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장면들이 펼쳐졌어. 무용수들이 무대가 떠나가도록 소리 지르질 않나, 관객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개들이 나와서 짖어대기까지...... 지금 봐도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 당혹스러울 만했지.

<카네이션>은 종종 ‘난해하다’는 말을 듣는 작품이야. 서사가 거의 보이지 않고, 어떤 순간은 장난스럽다가도 다음 순간엔 이유 없이 불안해져. 무대 위 장면들이 서로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는지 알 수 없을 때도 많고. 그런데 이 혼란스러움이 바로 피나가 원했던 감각이야. 그녀는 인간의 감정이 늘 언어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그녀의 공연은 ‘이야기’를 주는 대신, 감정이 생겨날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둬. 관객마다 전혀 다른 감각을 가져가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 누군가에겐 슬픔처럼 보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기묘한 유머로 보이기도 하지. 

〈카네이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세계의 모든 비극을 끌어안고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동력, 너무나 당연하고 단출하지만... 그래, 바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어. 아름다운 카네이션 꽃밭 위를 달리고, 그 위에서 춤추고 비명을 지르고 인간 세계의 비극을 연출하는 가운데, 자신들에게 닥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예쁘게 서있던 꽃들은 모두 쓰러지고 짓밟혀.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 모두는 핑크빛 카네이션 꽃밭 한 가운데 있어.

우리를 둘러싼 삶이 때때로 알 수 없이 우리에게 가혹해도, 내게만 차가운 이유를 찾을 수 없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해. 공연의 시작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노래 〈The Man I Love〉 에 맞추어 행해지는 남자 배우의 수화 안무는 그래서 감동적이야. 귀가 들리지 않는 이에게조차 반드시 전달해야 하는 이 노래는 언젠가 만나게 될 사랑하는 이에게 최선을 다해 후회없이 잘해주리라는 다짐을 담았어. 피나가 관객 모두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건네는 사랑의 악수인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