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 겪어본 적 있어? 친한 친구가 이제껏 이야기하지 않았던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적. 상상은 해봤지만 한 번도 피부로 와닿지 않았던,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불가항력적 사건이 가까운 사람의 고백을 통해 내 삶에 불쑥 들어온 적 말이야. 

나는 '누군가가 겪은 일'이 '내 친구가 겪은 일'이 된 처음 순간을 기억해. 친구의 고백에 적절한 반응을 해야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한 마음을 애써 숨겼었지. 내가 나의 과거를 처음 털어놨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내 이야기를 듣고 당황한 친구가 힘겹게 빚어낸 위로를 서툴게 꺼내거나 무덤덤하게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을 때 나는 그저 생소했던 그 상황을 넘어가기에 바빴거든.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은 누군가의 아픔이 처음 발화되는 순간에 관한 영화야. 인생의 길목마다 겪는 시련 정도가 아니라 재난처럼 들이닥친 불행을 겪은 인물이 자신의 아픔을 처음 고백하는 이야기지. 

영화는 중반까지 주인이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줘. 남자친구와 키스하거나 친구들과 생리며 섹스 이야기를 나누다 꺄르르 웃는 장면은 내밀하긴 하지만 결코 이상할 것 없는 여느 10대 소녀의 모습이었어. 맏이로서 동생과 함께 집안일을 뚝딱 해치우고 선생님에게 살갑게 구는 주인이는 '괜찮은 애'로 정평이 나 있었지.

괜찮은 애였던 주인이가 이상한 애가 된 건 같은 반 친구와 싸우면서부터였어. 곧 출소하는 아동 성폭력범이 동네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성명 운동을 벌이는 친구에게 주인이가 반기를 들었거든. 이 과정에서 주인이는 사실 자기도 성폭력 피해자라고 우발적으로 뱉고 말아. 주인이가 지적했던 성명서 문장은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일상이 파괴된다'라는 내용이었어. 주인이는 "나도 피해자인데, 내 일상이 파괴된 것처럼 보이냐"라며 친구에게 따져물었지. 

편하게 앉아 영화를 보던 나는 주인이가 어릴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심란해졌어. 주인이가 겪은 일을 알게 된 친구들도 복잡한 속내를 비치며 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지.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주인이에게 서운함을 느끼거나, 주인이가 이제껏 보인 행동에 '성폭행 피해자여서 그런 거였다'라며 편견을 갖거나, 주인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편함을 느끼는 식으로 말이야. 

당혹스러운 건 주인이도 마찬가지였어. 처음 아픔을 털어놓은 후 밀물처럼 몰려오는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지. 친구에게는 아무렇지 않다며 밝은 척했지만 엄마에게는 화풀이하며 죄책감을 덧씌웠거든. 누구보다 잘 지내고 싶었기에 되레 자신의 아픔을 숨겨야 했던 주인이에게 남자친구는 '너를 잘 모르겠다. 네가 어렵다'라며 이별을 고해.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까 봐 두려워서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지 못해. 특히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의 고백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층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해서 개인은 지워지고 전형적인 피해자 혹은 투사의 이미지만 남게 되지. 

성폭력 피해자의 모습을 떠올려 봐. 연이 머릿속 그들은 일상이 파괴된 채 울고 있니? 아니면 성폭력 예방 대책을 정치권에 요구하며 싸우고 있니? 내가 보기에 그들은 그저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친구와 야한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대고 나잇값을 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남들보다 약간 더 복잡한 평범한 사람이야. 피해자성이니 인권운동이니 하는 대표성을 짊어지지 않고 오롯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아픔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과제는 이것뿐이야.

주인이는 자신의 상처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놔. 어느 날 목젖으로 울컥 치밀어 오른 아픔을 도저히 삼킬 수 없어서, 말하는 순간 그 언어에 갇힐 것을 알지만 자신이 느끼는 괴리감을 설명하기 위해 토해내듯 내뱉는 거지. 

아픔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이유는 그것이 외부 세계의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면화된 것이기 때문이야. 아픔은 정면으로 부딪치거나 딛고 일어서야 하는 대상이 아니야. 영화 속 태권도장 기둥에 남은 그을음처럼 몸과 마음에 흉터로 새겨진 나의 일부분이지. 그래서 부정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고 그저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픈 손가락인 거야.

나의 아픔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너의 아픔을 언어로 함부로 규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한층 성숙해질 수 있어. 주인이가 성명문에 사인하기로 동의하면서 '나는 피해자이지만 보다시피 잘살고 있다'고 당차게 말한 것처럼. 세차장을 통과하는 차 안에서 악에 받쳐 소리 지르며 울었던 주인이에게 엄마가 '한 바퀴 더 돌까?' 얘기했던 것처럼.

나는 주인이가 다음번에는 조금 더 침착하게 자신의 상처를 고백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주인이의 친구들도 다음에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타인의 상처를 대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들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서로 연애 상담을 하고 저급한 농담을 주고 받겠지. 그렇게 주인이가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진로희망란에 사랑이라고 적어 낸 주인이의 바람이 깊은 상처 위를 소복이 덮을 수 있기를.

연아, 사실 나 고백할 게 있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 불이 켜진 후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나도 성폭행 피해자였기 때문이야. 아직도 아동 성폭행 관련 뉴스만 보면 심장이 두근거려. 그날 이후 내 뇌가 어딘가 망가져서 이렇게 자주 울적하고 살아가는 게 힘든 건지 생각하곤 해.

난 아직도 술에 진탕 취한 채 모르는 남자 앞에서 펑펑 울기도 하고 아픔을 무기 삼아 누군가에게 상처 주기도 해. 동시에 자전거를 타고 종주를 다니거나 출퇴근하며 1인분의 몫을 살아가고 있어. 아마 난 서른 살이 돼도, 마흔 살을 먹어도, 머리카락이 희끗해져도 우울해하고 있겠지. 그렇게 한번 살아가 보려고. 단지 세차장이 필요한 주기가 점점 길어지기를, 내 삶의 맑은 날을 더 오래 만끽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