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5개월의 시간 동안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달려왔다면,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새도 없을 만큼 지치고 힘들었다면, 교양이라는 것이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 안에서나 잠깐씩 누리는 사치였다면 연이는 어떤 것에 잠시간의 평화를 의탁할래?

'미쟝센단편영화제'라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나와 동료들은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어. 때로는 지겨워서 넌더리가 나기도, 미묘한 감정으로 가득 찬 눈물이 나기도 했지만 마침내 극장을 꽉 채워 앉은 사람들을 보며 고단함은 눈 녹듯 사라졌어.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이렇다 할 문화생활을 할 시간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 가장 괴로웠어. 영화제를 준비하기 위해 수많은 개봉 영화와 전시를 놓치고 말았지. 그러면서 생각하게 됐어. 내게 영화와 전시를 보는 일은 영혼을 채우는 일이라는 걸. 메마른 내 마음은 어떤 책을 읽고 나서 다시 촉촉한 빗물을 머금었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내내 부적처럼 가방에 품고 다녔던 책을 소개할게.

⟪불이 켜지기 전에⟫는 씨네21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저자 김소미 씨의 첫 산문집이야. 오랜 시간 영화기자로 활동하면서 경험했던 다양한 '씨네21 기자'만의 생활과 에피소드들, 그리고 자신과 영화의 관계를 탐구한 에세이이기도 하지. 나는 늘 궁금했거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직업인의 어떤 삶은 어떤지, 더구나 김소미 기자처럼 대중적인 사랑까지 받는 이의 생활은 어떤지 말이야. 책장 넘어가는 속도에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영화 그 자체를 삶의 태도로 받아들인 이가 겪을 법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았어.

 헬스장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는 세상의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은 그곳에 다 모여 있음을 첫 눈에 알 수 있었다. (...) 육신의 존재감이 이토록 왕성한 공간에 있어본 게 얼마 만이었더라. 진정한 '저녁이 있는 삶'을 사는 부지런한 사람들을 나는 경외감에 찬 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까스로 일주일에 한 번, 출장이 겹치면 2주에 한 번씩 헬스장에 드나들었다. 천 개의 기사가 내게 무언가 남기긴 한 것이다. 운동해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 본문 중에서

 약아빠진 어투로 말하자면, 차선으로서의 직업은 언제든 다 던져버리겠다는 호승심마저 허락해주기에 엉덩이를 일단 걸터앉게 하고 집중하게 한다. 그런 가벼움이 몇 시간씩 끈덕진 자세로 매달리도록 한 사람을 이끌기도 하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심신이 지쳐 출퇴근 지하철에서 동태눈으로 릴스만 넘기는 자신이 싫었어. 지하철에서라도 책을 읽자고 생각했지. 그렇게 꺼내 든 ⟪불이 켜지기 전에⟫는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동안 내 마음 속 바이블이 되어 주었어. 덤덤하게 써 내려간 자신의 삶과 영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묵묵하게, 가득하게 쓰여 있어. 그토록 묵직한 사랑 고백은 다른 사람을 감명 시키기에 충분하지. 나 또한 그에게 비밀스러운 동료로서 기꺼이 우정을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