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교감할 때 가장 편한 수단은 '말'이야. 무슨 일 하세요, 몇 년생이세요, 이름이 무엇인가요, 저에게 관심 있으세요? 오해하려야 할 수 없는 말을 던지면 그에 맞는 명확한 답이 나오거든. 글 씁니다, 98년생입니다, 주영이요, 글쎄요? 마가 뜨지 않는다면 서로에 관해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그래서 그런가, 나는 말로 하는 대화는 좀 재미없는 것 같아.  

나는 말 없이도 서로를 알 수 있는 대화를 좋아해. 저번 주 극장에서 봤던 ⟨챌린저스⟩를 예시로 들어 볼게. 고등부 아마추어 테니스 선수인 '패트릭'과 '아트'는 여자부 경기를 관람하다가 '타시'를 발견해. 건강한 몸, 뛰어난 실력, 관중을 사로잡는 존재감까지. 두 소년은 타시에게 첫눈에 반하지.

그들은 그날 저녁 후원 파티에서 타시에게 말을 걸어. 그렇게 마주한 세 사람은 테니스라는 공통분모로 말을 터. 타시는 두 사람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테니스란 무엇인지 설명하지.  

코트 위에 선 두 선수는 말 대신 공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돼. 상대가 승부를 거는 타입인지 안정을 추구하는 타입인지, 불안하면 표정에서 드러나는지 스텝이 꼬이는지,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지, 자기 루틴을 강박적으로 지키는지 등등… 테니스를 매개로 서로를 알고 나면 더 이상 말은 중요하지 않아. 이때 서로가 느끼는 유대감은 분절된 단어로 쌓아 올린 얄팍한 사이보다 끈적한 무엇이 되지.

타시는 이 관계를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런 관계에서만 진정성을 느끼는 사람이야. 테니스를 비유로 든 영화 속 모든 대사를 보면 알 수 있어. 성인이 된 타시와 패트릭이 말다툼하는 장면에서 패트릭이 "지금 우리 테니스 얘기하는 거 아니잖아"라고 하자, 타시는 "그거 말고 우리가 얘기할 게 뭐 있어?"라고 되받아치거든.

러닝타임 내내 질주하는 영화는 패트릭과 아트의 마지막 경기에 다다라서 아예 말을 최소화해. 타시와 관객은 숨을 죽이고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지. 시야를 흐리는 땀방울을 뚫고 오가는 눈빛, 힘이 잔뜩 실린 서브와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 매치포인트. 가장 연약한 마음 한구석을 파고드는 패트릭의 손짓에 구겨지는 아트의 표정은 두 사람을 지켜보는 타시마저 달뜨게 하지. 

결판을 짓는 일은 사실상 수단이고 경기 자체가 목적인 이 씬에서 관객인 나조차도 손에 땀을 쥐었어. 타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끝내주는 테니스 경기'는 어쩌면 얽히고설켜서 말이 필요없어진 세 사람의 관계를 의미하는 걸지도 몰라.  

이 영화가 131분을 소모해 증명했듯 무언의 대화는 매력적이야. 타시가 테니스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나는 영화를 좋아하니까, 누군가와 영화를 매개로 침묵 속에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예컨대 이런 거야. 어떤 사람과 영화 한 편을 같이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돼. 영화를 집에서 보는지 극장에서 보는지, 극장에서 본다면 프랜차이즈 영화관에서 보는지 독립영화 극장을 굳이 찾아가는지, 어떤 영화를 고르고, 어떤 음료를 마시며 또는 마시지 않으며, 팔짱을 끼는지 다리를 떠는지, 엔딩크레딧까지 앉아 있는지 아니면 음악과 함께 퇴장하는지까지.  

연인과 손을 잡고 영화를 볼 때면 우리의 대화는 더욱 매끄럽게 흘러가. 어떤 장면에서 손에 힘이 들어가는지 혹은 풀리는지, 어떤 장면에서 내 쪽으로 기대는지 또는 반대편으로 다리를 꼬는지, 영화를 보며 나와의 간격을 어떻게 조정하는지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우리는 수다스러워서 영화관에는 스크린속 세상과 서로만이 남아있는 것 같아. 타시의 대사처럼 어딘가 아름다운 곳으로 함께 떠난 거야.

그렇게 본 영화는 유독 인상에 깊이 박히더라고. 왠지 모르게 더 깊이 몰입한 듯한 느낌도 들고 말이야. 그것도 끝내주는 영화 관람이었던 걸까? 어쩌면 타시가 그랬던 것처럼 난 이미 그 대화에 중독된 걸지도 모르겠네. 연이 너에게는 말없이 대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니? 궁금하니까 답장으로 남겨줘.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