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극장에서 ⟨머티리얼리스트⟩를 봤어. 뉴욕의 한 결혼 정보 회사에서 커플 매칭 매니저로 일하는 '루시'와 그를 둘러싼 두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였지. 한 남자는 자산, 연봉, 외모, 집안, 매력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완벽한 결혼 상대였고 한 남자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겸하며 근근이 먹고 사는 연극배우였어. 

루시는 두 남자를 두고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해. 이 결말을 두고 몇몇 관객은 '영화가 낭만적인 결론을 내느라 개연성을 잃었다'라고 비판하더라. 나는 조금 다른 의견이야. 오늘 레터에서는 이 얘기를 해볼까 해.

부족한 집안에서 태어난 루시는 한때 연극배우를 꿈꿨지만 재능도 여력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진로를 바꿔. 다행히 루시에게는 남녀의 조건을 정량적으로 따지고 비슷한 사람끼리 연결하는 재능이 있었어. 루시의 도움으로 결혼을 앞둔 고객이 메리지블루에 빠져도 루시는 그의 마음을 다잡고 기어코 신부를 버진로드 위에 세우며 실적을 채웠지.

루시는 독립적인 여자야. 부자 남편을 만나서 현재의 궁핍한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보다 강하지만, 그 욕망을 위해 평범한 아내 역할을 받아들일 정도로 자아가 왜소한 사람은 아니었지.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어. 

그만큼 일이 실패했을 때 좌절감도 크게 느꼈지. 자신의 고객이 첫 데이트에서 성폭력을 당하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상한 사람을 고객에게 소개해줬다'라는 죄책감 때문에 직장을 관두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실수를 만회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괴로워하는 루시 곁을 지킨 사람은 존이었어. 반면 해리에게 루시는 어떤 고민도 털어놓지 못했지. 해리가 자신의 신체 결함을 루시에게 고백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야. 서로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둘에게 자기 그림자는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것이었으니까.

누구나 도덕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하고 싶어 해. 해리는 결혼 시장에서 만점짜리 신랑감이고 자신은 찌그러진 육각형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말할 만큼 루시는 공정한 사람이야. 결혼이 철저히 비즈니스인 사회에서 적어도 자신은 사기꾼이 아니라는 자존심, 그것이 루시의 원동력이자 신념이었어. 

해리가 자신과 헤어지려는 루시를 설득하며 "우리는 잘 맞는 파트너가 될 거다"라고 말해. 루시는 "그래도 사랑이 전제돼야 하잖아요.(Love has to be on the table.)"라며 거절하지. 이건 낭만을 좇는 이의 대답이 아니야. 도덕적으로 빚질 수 없다는 자존심이자 사랑이 논해지지 않은 미완의 계약을 파기하는 선언이지.

이 대목에서 루시가 존을 선택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어. 그건 바로 자신의 결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존이었기 때문이야. 비슷한 성장배경, 함께 꿨던 배우라는 꿈, 돈이 없는 지독한 연애를 5년 동안 이어왔던 두 사람. 결핍은 결핍을 알아봐. 그건 강력한 끌림이지. 

나의 맨바닥을 드러내도 기꺼이 안아주는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설득력을 지녀. 우리는 어떤 이를 장점 때문에 좋아하고, 단점 때문에 사랑하니까. 루시 말대로 많은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데이트에는 잦은 실패와 위험이 뒤따르지만, 사랑은 쉬워. 누군가를 좋아하기까지의 과정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서로의 결함을 알아챈 이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보다 힘들 수는 없는 거야.

결혼이란 어쩌면 자신이 가진 최고의 조건들을 주고받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최악의 조건들을 몽땅 꺼낸 뒤 ‘내 것과 당신의 것을 가족이라는 이름의 바구니에 넣고 함께 관리하겠다’라는 내용의 합의인 게 아닐까. 루시와 존은 기쁜 마음으로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고.

서로의 최악을 평생 견뎌주자는 맹세라면 사랑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도 괜찮겠지. 세상 모든 존과 루시에게 영화 속 한 대사를 바치고 싶어. Just go where love 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