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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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은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야. 광복절은 매년 돌아오는 기념일이지만, 80주년이라는 숫자가 주는 울림은 확실히 무겁게 다가오더라고.

연이도 잘 알겠지만 독립운동가들은 각자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조국을 위해 싸웠어. 이전 다야의 레터에서 소개한 간송 전형필 선생도 그중 한 사람이었지. 학생, 농민, 양반 등 다양한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그 안엔 물론 ‘여성’도 있었어.

여기서 새삼스럽지만 꼭 해보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어. 연이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몇 명이나 떠올릴 수 있어? 유관순 열사, 김마리아 열사… 나는 부끄럽게도 한 손을 다 채우지 못했네.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는 그렇게 잊힌 이름들을 다시 불러오는 책이야. 여성독립운동가 14인의 삶을 글과 그림으로 복원한 작품인데, 이들 중에는 노동운동가도 있고, 간호사도 있고, 비행조종사도 있어. 각자의 방식으로 활약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졌지. 그 삶을 되살리기 위해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 화백이 그들의 초상을 그렸고, 김이경 작가는 1인칭, 3인칭, 편지 형식 등 다양한 서사 방식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복원해 냈어.

이번 레터에서는 책에 등장한 14인의 여성독립운동가 중 한 분인 박차정 의사를 소개하려 해. 박차정 의사는 1910년, 경상남도 동래(지금의 부산)에서 태어났어. 그가 여덟 살이 되던 해, 동래 지역에서 이름난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는 경술국치 이후 분노와 자책 속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지.

박차정 의사는 항일운동에 투신한 친척과 오빠의 영향을 깊이 받았어. 그들의 이상과 열정은 어린 박차정 의사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는 점차 항일민족의식과 여성해방에 눈뜨게 돼. 그 결과,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재학 시절엔 동맹휴학을 주도하며 학생운동의 선두에 서기도 하였지.

졸업 후에도 그는 활발한 사회운동을 이어갔고, 1930년에는 광주학생항일운동* 후속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 이를 계기로 그는 둘째 오빠 박문호가 활동하던 중국으로 망명했어.

*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된 대표적인 학생 중심의 항일 민족운동.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을 계기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박문호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었고, 박차정 의사도 자연스레 의열단에 합류하게 돼. 그리고 이후, 의열단장 김원봉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지. 그 뒤로도 박차정 의사는 항일운동의 최전선에서 자신의 역할을 이어갔어.

한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갈수록 심해지는 일본의 무력 공세에 맞서기 위해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938년에는 항일 연합전쟁을 수행할 군사 조직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어. 박차정 의사는 조선의용대 본부에서 포로 공작, 조선인 교육 등의 임무를 맡아 헌신했고, 이후에는 부녀복무단 단장으로서 조직을 이끌기도 했어.

1939년 전선이 더욱 확대되자 의용대는 직접 전투에 투입되었고, 박차정 의사도 광시성(광서성) 곤륜관 전투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총상을 입게 돼. 결국 총상의 후유증과 합병증으로, 광복을 한 해 남긴 1944년 그는 충칭에서 세상을 뜨게 되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그는, 동시에 섬세한 언어 감각을 지닌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였어. 일신여학교 재학 시절에는 교지에 시, 소설, 수필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지. 그중에서도 단편소설 ⟨철야⟩는 그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야. 독립투사가 옥사한 뒤, 고아가 된 아들딸이 사회의 냉대와 굶주림 속에서 겨울밤을 견뎌낸다는 내용이지. 그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본 교사들은 그에게 문학과 진학을 권했지만, 박차정 의사는 독립운동에 투사하기로 결심해.

박차정 의사는 글을 써서 시대를 증언하는 대신 총을 들고 조국을 위해 싸웠어. 또한, 항일민족운동만큼이나 여성해방운동에도 성을 다 했지. 식민지 여성에 대한 그의 의식은 1936년 결성한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에서도 잘 드러나 있어.

우리 조선의 여성은 오랫동안 전통적 속박으로 인권이 유린되어 왔고 다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함으로써 전통적 속박에 의한 가정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약탈시장의 상품으로 임금노동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중에서

이처럼, 그들이 견뎌야 했던 시대의 불행은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고통만이 아니었어. 그 위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짊어져야 했던 또 하나의 억압이 있었지. 하지만 그 억압 앞에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어. 시대에 저항하며 목소리를 냈고, 행동으로 역사를 만들어냈지. 그러나 광복 이후 80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그 이름들은 서서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몫을 잃어가고 있어.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의 저자 김이경 작가는 자서에서 이렇게 밝혔어.

부디 여기 그려진 14인의 초상을 보며 그들의 삶을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뜨거움으로 느낄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도 모두 살아 있음을 느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 본문 ⟨프롤로그: 김이경의 말⟩ 중에서

14인의 인물 중 박차정 의사를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가 글을 썼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자전적 내용을 담은 단편소설 ⟨철야⟩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승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박차정 의사가 지금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생각해 보았어. 문학계에 등단하여 언어를 조각하는 문인이 되었을까. ‘철애’라는 가명을 사용할 정도로 사랑했던 철학을 공부하며 살았을까. 아니, 적어도 시대의 소용돌이가 그를 잠시 비켜갔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만났을지도 모르지.

그가 조국의 독립과 여성해방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은 고작 그의 나이 서른넷의 일이야. 족쇄 같은 시대에서도 당당하게 살다 간 그를 보며 나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어. 박차정 의사에 비하면 티끌만 한 생채기도 글로 풀어내야겠다고 운운하는 모습이 칭얼대는 어린애 같이 느껴졌고,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안락함 내 것이 아닌 것 같단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지.

어쩌면 이 부끄러움이 저자가 말하는 ‘살아 있음’이 아닐까? 내 안에 무뎌지고 무뎌져 죽어가던 어떤 마음에 이 책이 다시 불을 지피는 것 같았어. 무심코 외면하고 지나쳤던 이름, 그 이름 뒤에 있던 삶과 신념을 마주하면서 내 안의 감각들이 다시 깨어나는 느낌이었지. 아프고, 부끄럽고, 동시에 무언가를 더 사랑하고 싶어지는 마음. 그건 분명, 그들이 이 땅에 남긴 보이지 않는 유산일 거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 오랫동안 기억에서 밀려난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고, 무관심 속에 가려졌던 목소리에 다시 귀 기울이는 일.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현재이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을 비추는 등불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