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에 금방이라도 파란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계절이야. 작년 이맘때에는 경주 우양 미술관 전시 《사유하는 미디어》를 소개했더라. 그때와 지금의 나는 고작 일 년 사이에 아주 많은 것들이 달라졌더라고. 직업이나 일을 대하는 관점도 달라졌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도 다른 국면을 맞이한 것 같아. 무엇보다, 다가오는 9월이면 나는 누군가를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하게 돼. 평생의 반려자를 찾았다는 게 당연히 기쁘지만, 한편으론 지금까지 알던 세계와 작별하는 것이 겁날 때도 있어.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다는 건,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던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과거를 기억하고, 후회하고, 때때로 붙잡아두려는 시도를 반복하지. 그런 시도가 허망하기만 한 것은 아냐. 인간은 사진, 영상과 같은 기술의 힘을 빌려 과거를 붙잡아 두려고 했어. 그래서 과거는 붙잡혔을까? 오늘 소개하고픈 전시 《A kingdom like yesterday》는 앤디 킴 작가의 유년시절,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그 실패의 선언이기도 해.

친구의 추천으로 방문한 용산구의 작은 화랑에서 열린 앤디 킴 작가의 개인전은 소박하고 단란한 가족의 모습들을 담았어. 유년 시절의 사진을 캔버스 위에 재현해 두면서도 작가만의 독특한 터치와 표현 방식이 돋보이는 그림들이었지. 뒤통수가 튀어나온 옛 브라운관 TV 속 화면처럼, 가로 형태의 노이즈가 자글거리는듯한 효과를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이 두드러지게 채색했대. 

왼쪽 사진은 앤디 킴 작가가 동생과 함께 찍은 유년 시절 사진을 재현한 것이고, 오른쪽은 작가의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이라고 해. 왠지 익숙하지 않아? 난 이 사진들이 꼭 본가 서랍장 한켠에 잔뜩 쌓여있는 필름 사진들 중 하나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이 작품이야.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가족과 놀러 갔던 이름 모를 해수욕장이 생각났거든. 엄마의 등쌀에 선크림을 대충 펴 바르곤 바다로 달려 나가 한참을 첨벙이다, 저 멀리 빽빽한 파라솔과 돗자리 사이를 오가며 치킨을 파는 아저씨를 봤어. 엄마를 졸라 만오천 원을 건네고 덜 마른 몸으로 치킨을 먹어치웠어. 그리고 다시 바다로 들어가길 반복. 젖은 발에 모레가 달라붙는 감촉까지, 신기하게도 이런 기억들이 저절로 떠오르더라고. 내가 경험했던 단 하루의 기억일까? 아니면 내가 다녀왔던 많은 여름휴가들이 중첩되어 생겨난 기억일까.

앤디 킴의 작품 속 피사체는 흐릿해. 그림자의 실루엣으로 표정을 겨우 가늠할 수 있거나, 어떤 작품은 코가 그려지지 않은 인물들도 보이지. 이런 불투명함, 디테일의 소거에서 나는 더 많은 얼굴과 기억을 봤어. 나의 유년 시절은 마치 480p처럼 흐릿한 화질로 기억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흐릿한 기억 속 장면들이 어제 본 4K 영상보다 더 또렷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 그래서일까, 이 전시와 무척이나 닮은 영화 한 편이 생각났어.

영화 ⟨애프터썬⟩의 주인공, 11살 소피는 아빠와 터키로 둘만의 바캉스를 떠나게 돼. 낡은 리조트에서 아빠와 보내는 시간들은 화려하지도, 특별히 짜릿하지도 않았지만 소피에게 최고의 휴가로 꼽힐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지. 하지만 이 여행이 소피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후로 다시는 아빠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소피가 행복한 휴가를 즐기는 동안 아빠에게 바다만큼 깊고 푸른 슬픔이 서려 있었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거지. 20년이 흐른 후, 소피는 아빠와 보낸 휴가 때 찍어두었던 영상을 다시 꺼내 놓아.

소피는 인터뷰 놀이를 하며 아빠에게 질문해. "아빠가 11살 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카메라 속 아빠가 대답 대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아. 20년 후, 그때의 아빠와 같은 나이가 된 소피는 저 장면에서 어떤 답을 기다렸을까. 낡은 캠코더를 돌려 보며 무엇을 구하고 또 무엇을 후회하고 있을까.

이 영화는 소피의 기억이자 의식이야. 아빠와 촬영한 캠코더 푸티지 외에, 영화 속에 재현되는 모든 것은 소피의 왜곡되고 변형된 기억이기도 한 거지. 기억은 실제와 완벽하게 같지 않으니까. 소피는 당시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 해. 하지만 만약 그것을 안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거야. 아빠의 사랑은 자신의 슬픔을 딸이 모르게 하는 것으로 완성되었거든.

기억은 불완전해. 시간을 사진과 영상으로 붙잡아둔다 한들 거기엔 또 다른 왜곡과 변형이 생겨나. 두꺼운 먼지가 쌓인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우리는 과거가 남긴 잔상들을 통해서만 그 시절을 돌아볼 수 있어.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들, 현재의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끝내 소멸될 과거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과거를 불러내고 기억하도록 만들지. 앞서 언급했던 여름휴가 기억이 왜곡된 것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아. 내가 다녀온 모든 여름의 정수이자 총체이니까, 사실이 아니라도 진실일 수는 있잖아.

잊고 싶지 않은 기억, 잊지 말아야 할 기억 모두 시간 앞에 허망하게 흐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앤디 킴은 기억이 흐려지고, 변화하고 작용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기억과의 대화'를 유도하는 것 같아. 연이의 여름은 어땠어? 기억의 바다에서 실컷 헤엄쳐 보기를 바라면서, 앤디 킴의 작가 노트로 레터를 마무리할게.

저에게 이 과정은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저는 같은 종류의 이미지로 계속 돌아오곤 합니다. 해답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저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저의 회화는 점점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자 하는 시도이며, 동시에 그것들이 온전히 재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