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끈적이지, 거리는 무덥지, 에어컨 아래지만 일은 고되지. 여름볕에 시름시름 앓다 보니 복잡하고 섬세한 영화보다는 단순 무식한 게 끌리더라. 

오늘 소개할 작품은 고공 서바이벌 스릴러물 〈폴: 600미터〉야.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고 나름 웅장한 영상미도 있어서 여러모로 쉽게 손이 갈 영화니 어느 여름 저녁에 시원한 맥주와 함께 곁들이는 걸 추천하면서 글을 열어 볼게.

클라이밍을 즐기는 주인공 벡키와 그의 남편 댄, 친구 헌터가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함께 오르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해. 서로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오르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새 때문에 댄은 손을 놓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몇 달을 술과 약에 취해 지내던 주인공은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잊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헌터와 다시 만나. 헌터는 벡키에게 '기분을 바꿔줄 계획'이라며 한 가지를 제안하지. 600m짜리 버려진 TV 타워를 맨몸으로 오른다는 미친 계획을 말이야.

댄의 죽음 이후 단 한 번도 클라이밍을 하지 않았던 벡키는 헌터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주인공은 시련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법이야. 벡키는 댄의 1주기를 맞아 그의 유골을 600m 타워 상공에서 뿌려주겠다고 다짐하며 헌터의 위험천만한 모험에 동참하지.

6시간 동안 운전해서 도착한 B-67 TV 타워는 녹이 잔뜩 슬어있는 웅장한 구조물이었어. 얼마나 거대한지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 있었지.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점심 전에 식당으로 복귀해 시원한 맥주를 마시자는 그들의 목표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벡키와 헌터는 등반에 성공하지만, 녹슨 볼트가 풀리고 사다리가 무너지면서 타워 꼭대기에 갇히고 말아. 영화는 두 사람이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면서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들을 차례대로 전개하지. 그들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연이가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스포일러는 하지 않을게.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의문은 이거야.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TV 타워를 오르겠다는 정신 나간 발상을 실행에 옮기는가. 얼마나 멍청하면 녹이 슨 게 뻔히 보이는데도 살이 노출된 복장으로 타워를 오르는가. 얼마나 죽고 싶어 환장했으면 장난을 친답시고 사다리를 일부러 흔드는가. 결국 타워에 갇힌 두 사람을 보고 관객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생각하겠지. '고구마다. 이해가 안 되네. 쟤네 대체 왜 저래?'

나의 영화 지론 중 하나는, 영화 내용으로 화내는 일만큼 비효율적인 관람 방식은 없다는 거야. 솔직히 말해, 그냥 영화잖아. 그들이 맨몸으로 타워를 오르면서 필연적으로 다치고 피를 봐야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어. 파상풍에 걸릴까 봐 무서워서 온몸을 기능성 클라이밍복으로 칭칭 감은 등장인물이 과연 스릴 있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관객을 설득할 때는 로고스(논리적 접근)보다 파토스(감정적 호소)가 전략적으로 잘 먹히기 때문에 화자는 파토스를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지. 온통 논리로 무장한 영화는 재미가 없어서 아무도 안 보고, 감정을 자극하면 화라도 내면서 영화를 끝까지 본다는 거야.

이성적 납득은 잠시 제쳐두고 주인공의 감정에 집중해 보자.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은 이거야. 음식도 물도 탈출 방법도 요원한 그곳에서 고통받느니 타워 아래로 몸을 던지면 그만인데 왜 벡키는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할까. 남편의 죽음 이후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린 사람처럼 보였던 벡키는 왜 타워 꼭대기에 갇히고 나서야 다시 살고 싶어졌을까. 애초에 왜 벡키는 댄과 함께 암벽 등반이라는 위험한 스포츠를 즐긴 걸까. 그들은 대체 거기서 무엇을 찾았던 걸까.

내가 처음에 했던 말 기억나? 날이 덥고 일이 고돼서 단순한 게 끌렸다고. 벡키도 마찬가지야. 치사량이 제거된 도시에서는 삶을 향한 의욕도 희미해지지만, 다른 어떤 수식어도 없는 죽음 앞에서는 생존 본능이 펄펄 끓어오르니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살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삶을 움켜쥘 강한 악력을 선사하는 법이야. 

생각이 많으면 피곤해. 어쨌든 죽고 싶지는 않잖아? 이미 서 있는 곳이 피자 판만 한 타워 꼭대기라면, 왜 여기 서 있게 된 건지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여기서 살아남을지 고민하면서 푹푹 찌는 이 여름을 견뎌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