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러브

이 레터가 연이에게 도착하는 날은, 유학을 떠나는 내 친구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야. 그 친구는 만나는 날 ‘인류애 차오르는/쉬어가기 좋은/한국이 그리울 때 읽기 좋은/위로가 되는’ 책 세 권을 추천해 달라고 했지. 책으로 뉴스레터를 쓴 지 일 년 반이 넘었지만, 여전히 책을 추천하는 것은 참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야. 그만큼 기쁘기도 하고.

그렇게 친구의 미션을 받고 책장을 둘러보는데, 책 한 권이 눈에 띄었어. ‘인류애 차오르는’ 카테고리에 이보다 알맞은 것은 없겠다 싶었지. 오늘 소개할 책은 루리 작가의 ⟪긴긴밤⟫이야. 어린이 소설인데, 아마 읽어본 연이들도 있을 거야. 2021년에 출간되어 여전히 베스트셀러에 자리하고 있는 책이거든. 이번 레터는 ⟪긴긴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나중에 확인하고 싶은 연이들은 참고해 줘!

이 글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의 이야기로 시작돼. 노든은 어린 시절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랐어. 자라면서 코가 길어지지 않는 자신을 보며, 그제야 어렴풋이 자신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하지만 그곳에서는 그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어. 무리가 따르는 할머니 코끼리는 노든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거든.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 본문 중에서

코끼리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편안했고 평화로웠어. 그러나 궁금한 것들이 많았고,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었던 노든은 고아원에서 나가기로 결심해. 그리고 바깥세상에서 여러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지. 첫 번째 만남은 바로 그의 아내였어. 노든은 바깥세상에서 아내를 만나고, 딸을 낳아 가정을 꾸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아내와 딸이 사냥꾼의 총에 의해 목숨을 잃으며 노든은 결국 다시 동물원으로 옮겨지게 돼.

그곳에서 노든은 흰바위코뿔소 ‘앙가부’를 만나. 노든은 가족을 죽인 인간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로 늘 나쁜 꿈을 꿨는데, 앙가부는 그런 노든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냈어. 둘은 함께 동물원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 그런데 어느 날, 코뿔소의 뿔을 도려가기 위해 침입한 사냥꾼들에게 앙가부가 죽임을 당하고, 노든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흰바위코뿔소가 돼. 심지어 동물원에서는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까봐 아예 노든의 뿔을 잘라내 버리지.

동물원을 탈출하려던 노든과 앙가부의 계획은 아이러니하게도 앙가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루어져. 바로 인간들의 전쟁 때문이었지. 무너지는 동물원을 뒤로하고 바깥세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노든은 세 번째 인연을 만나. 그 주인공은 펭귄 ‘치쿠’야. 펭귄 무리에서 버려진 알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동물원을 탈출한 치쿠는 노든과 함께 바다를 찾아 걷기 시작해. 

그러나 평생 동물원에서만 살았던 치쿠에게 바깥세상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어. 한낮은 너무 뜨겁고, 밤은 너무 추웠지. 알이 담긴 양동이를 물고 걷느라 부리는 해지고 있었고. 그러나 곧 바다가 나타날 거라는 확신이 치쿠를 멈추게 하지 않았어. 어느 날, 치쿠는 노든에게 말했어.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알을 돌봐 주겠다고 약속해 줘.” 그리고 긴긴밤이 지난 다음, 결국 치쿠는 숨을 거두었어.

과연 알과 함께 남겨진 노든은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까? 아기 펭귄은 무사히 태어나서 바다에 도착할 수 있을까?

송수연 평론가는 이 글을 두고 “이상한 이야기”라고 표현했어. 정말 그런 것도 같아. 코끼리와 함께 자란 코뿔소, 버려진 알을 품는 아빠 펭귄들, 그리고 펭귄 알과 남겨진 코뿔소…. 비슷한 점이 없어 보이는 존재들이 이처럼 연대하는 이야기라니 말야.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본문 중에서

마침내 태어난 펭귄 ‘나’는 자신이 닿았던, 그리고 닿지 못했던 모든 존재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연결돼. ‘나’는 노든을 통해 삶의 외로움과, 울타리를 나올 용기를 알게 돼. 노든의 아내를 통해 가족을 향한 헌신의 마음을 알게 돼. 치쿠와 윔보를 통해 자신이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지켜진 생명임을 알게 돼. 그렇게 그들의 사랑과 헌신, 우정과 용기를 마음에 품은 ‘나’는 비로소 자신만의 긴긴밤을 건너기 시작하지.

닮은 것이 전혀 없는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마법은 어디서 시작될까? 어쩌면 서로의 상처에 손을 얹는 순간에서 비롯되는지도 몰라. 노든이 그랬듯, 앞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야 할 ‘나’ 역시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견뎌내야 할 거야. 하지만 노든이 지난날의 상처에 아파하며 긴긴밤을 보낼 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어. 그의 곁을 지켜준 존재들이 있었지. 그리고 그들 역시 저마다의 긴긴밤을 지나왔어. 

사람이라고는 죄다 동물원 직원에 사냥꾼만 등장하는 이 책을 ‘인류애 차오르는’ 카테고리에 뽑은 것도 이런 이유야. 누구나 가끔 노든처럼, 세상에 나 혼자만 우두커니 남겨진 기분이 들 때가 있잖아. 내 머리 위로 핀 조명이 꽂히고, 주위는 어두컴컴한 독백 무대처럼. 나는 그럴 때마다 상황을 비관하며 더 깊은 어둠으로 숨곤 했어.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를 매번 건져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친한 친구일 때도 있었고, 친하지 않은 가족일 때도 있었고, 혹은 일면식도 거의 없는 낯선 사람일 때도 있었지. 그들은 왜 내 상처에 귀 기울이고, 흔쾌히 자기 몫의 무언가를 떼어 나를 메워줬을까? 아마 내가 겪는 고통이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세상에 붙어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민과 수고와 사랑이 있었을지 생각하면 아득해지기도 해. 그 모든 마음에 일일이 응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결국 내가 택할 수 있는 건, 받은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주는 일뿐이야. 그들이 긴긴밤을 견디는 순간에.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류애’야

⟪긴긴밤⟫은 내가 생일 선물로 받았던 책이야. 글이 정말 좋았다고 말하며 이 책을 선물해 준 친구가 있었지. 그리고 나는 일키를 통해 연이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있어. 이것도 사랑의 마음이, 그리고 인연이 흐르는 거겠지? 마음을 이어주는 실이 책이라니 참 낭만적이다. :)

오늘 레터도 재밌었기를 바라. 그리고 연이만의 ‘인류애 차오르는/쉬어가기 좋은/한국이 그리울 때 읽기 좋은/위로가 되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책이 있다면 답장하기를 통해 남겨줘. 천천히 읽어볼게!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