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삭하게 마른 청바지를 입고 집을 나서면 습기를 먹은 옷매가 금세 흐트러지는 계절. 

여름은 내게 사랑의 계절이야. 몽글몽글한 무언가를 떠올리기 쉽지만 내 여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이 시기에 나는 상투적으로는 아팠고 정확하게는 혼란했으며 늘 사랑으로 흐트러져 있었거든. 이 계절의 증인은 언제나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였어. 2018년부터 이어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아이 엠 러브⟩, ⟨서스페리아⟩의 여름은 항상 씁쓸한 뒷맛을 남겼지.

⟨퀴어⟩의 주인공 '리'는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채 미국에서 도망쳐 멕시코시티로 왔어. 중년의 나이를 먹고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던 그는 하룻밤을 보낼 상대를 물색하며 술집과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지. 그러다 '유진'이라는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마음을 줄 듯 말 듯 거리를 두는 유진 때문에 리의 마음은 타들어 가.

흔한 퀴어 로맨스물로 전개되던 영화는 2부와 3부에 접어들면서 전혀 다른 장르로 바뀌어. 리와 유진은 텔레파시 능력을 얻게 된다는 신비의 약초 '아헤'를 얻기 위해 남미의 한 정글로 떠나고, 그곳에서 괴짜 식물학자를 만나며 비현실적인 일을 겪게 돼.

아헤를 달여 마신 리와 유진이 입으로 심장을 토하거나 두 사람의 신체가 한 겹의 피부 아래에서 섞이는 기괴하고 아름다운 장면은 마치 사랑의 마지막 단계 같아. 육체적 끌림으로 시작된 감정이 애틋함과 측은지심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자아의 합일로 맺어지는 모습 같거든. 매번 유진에게 '너와 말없이 대화하고 싶어(I want to talk to you. Without speaking.)'라며 추파를 던진 리가 줄곧 원했던 텔레파시 현상이 일어나는 장면이기도 해.

사실 두 자아가 합일하는 모습이 성숙한 사랑의 종착역은 아니야.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독립성을 지키고 각자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형태가 '성숙하다'라고 여겨지잖아. 반면 이 장면은 오히려 플라톤이 말했던 에로스의 기원에 가까워.

인간은 본래 두 사람의 등이 붙은 하나의 생명체였는데, 신이 내린 저주로 갈라진 이후 반쪽짜리 인간들이 서로를 그리워하고 갈망하게 됐대. 그런 서로를 끌어당기는 초현실적이고 강렬한 힘이 바로 사랑의 정체라는 이야기지.

현대인은 '성숙한 사랑'이라는 신화를 숭배한 나머지 그 외의 것들을 욕망과 감정으로 치부해.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무너지고 부서지는 성질의 것이고,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과정은 결코 우아하지 못한 법이야. 술과 약에 찌들어 사랑할 상대를 찾아 떠도는 리의 모습이 이토록 가엾은 이유이기도 해.

아헤가 선사했던 기묘한 밤이 지나고, 리와 유진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글을 떠나. 하지만 바로 그 길에 리는 유진을 잃어버리고 말아. 이후 이어지는 연출은 더욱더 비현실적이야.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에서 리가 땅을 향해 떨어지거든. 우주를 떠돌던 영혼이 세상에 곤두박질쳐 몸이라는 감옥에 갇히는 순간이지.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을 영문도 모른 채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 여겨. 이 개념을 '피투'라고 불러. 인간은 자신이 던져진 이유가 없음을 깨닫고 불안에 빠져.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인간은 자신이 던져진 이유가 없기에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질 수 있어. 이 자발성을 '기투'라고 해. 리가 우주에서부터 지구로 추락하는 장면은 피투되는 인간을, 이후의 에필로그는 기투하기 위한 노력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야.

이쯤에서 영화 제목이자 리의 성정체성이기도 한 '퀴어'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 사전적 의미 그대로 '성소수자'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성숙한 이성애가 모범답안인 현대 사회에서 끝없는 혼란과 좌절을 겪어야 하는 퀴어의 삶이야말로 태초부터 이방인으로 태어난 인간 존재의 위태로움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비유야. 유진이 고백했던 말(I'm disembodied.)처럼 영혼과 육체가 화합하지 못하는 괴로운 상태가 우리의 기본값인 거지.

루카 구아다니노가 성숙한 사랑이 아닌 원초적인 사랑을 제시한 이유는 목적 없이 태어나 반쪽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처절함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살아있지만 언젠가 죽는 것처럼 사랑을 해도 어차피 실패할 거라는 당연하지만 괴로운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모두를 위로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유진이 자신에게 기꺼이 나눠줬던 체온을 떠올리면서 숨을 거둬. 이 결말은 사랑을 향해 자신을 끊임없이 내던졌던 리에게 감독이 표하는 경의로 느껴져. 또한 관객에게는 어차피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해. 언젠가 죽는다 하더라도 자살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야. 

내게도 사랑의 아픔을 가르쳐준 아무개에게 한 토막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 바삭하게 말린 청바지가 몇 걸음 만에 눅눅해지는 여름이 오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너에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여름비를 피하지 않게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