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 자기 분수에 넘치고 실속이 없이 겉모습뿐인 영화(榮華). 또는 필요 이상의 겉치레.’

나만 빼고 모두 어떤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혹은 나는 모르는 지식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모른다고 하는 게 부끄러워 아는 척해본 경험 한 번쯤 있을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적이 아주 많아. 처음에는 모르는 게 창피했고, 그 대화에 참여하고 싶었어. 들어본 적도 없는 영화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는 사람들이 부럽고 멋졌어. 지적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영화나 책을 열심히 본 적도 있었어. 하지만 마냥 억지로만 할 수는 없는 일인 게, 세상에는 정말 훌륭한 작품이 많잖아. 하나가 재미있어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하나를 발견하게 돼. 연결고리를 계속 따라가며 깊고 넓은 구덩이를 파게 되는거지.

내 이야기를 해볼게. 몇 년 전부터 내 주변 씨네필들의 입에 ‘빅토르 에리세’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어. 억지로 봤던 그의 대표작 ⟨벌집의 정령⟩은 “재밌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내 마음 속에 묵직한 파동을 일으켰어. 1940년 스페인, 한 시골마을에 사는 꼬마 ‘안나’가 극장에서 제임스 웨일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을 본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야. ⟨프랑켄슈타인⟩을 미리 봤더라면 더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에 직접 찾아보기도 하고, 소설 원작이 궁금해져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찾아 읽기에 이르렀어. 소설을 재밌게 읽고 나니, 동시대에 유행했던 고딕 호러, 그리고 그 대표 격인 ⟪드라큘라 백작⟫이 또 궁금해지고... 이렇듯 꼬리를 물며 파 내려가는 동안 내가 흡수한 것들은 모두 내 자양분이 되었겠지. 하지만 알면 알 수록 내가 아는 건 지극히 작은 세계의 일부라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

  

다시 돌아와서, 주영화의 레터에서는 교양의 조건을 비극에도 불구하고 삶을 예술적 동력으로 치환하는 태도라고 서술했어. 자연스럽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떠올랐어.

시를 쓰고싶어하는 주인공 ‘미자’는 동네 문화센터에서 시 쓰기 강의를 듣기 시작해. 시를 쓰기 위해, 그리고 시상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보는 것’이라는 강사의 말에 미자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것들을 열심히 보기 시작해. 단, 아름다운 것들만. 사실 미자는 알츠하이머에 걸렸고, 유일한 혈육인 손자는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학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어. 미자의 알츠하이머는 끔찍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미자가 시를 쓰려는 것 또한 현실에서 벗어나 고상한 예술의 세계에서만 머무르고 싶은 욕망을 나타내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하늘이나 나무, 새소리처럼 자연을 향한 미자의 시상은 얄팍하기만 해. 손자의 가해를 인정하고,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피해자가 뛰어내렸을 다리 밑에서 미자가 느꼈을 현실 인식과 고통은 내리는 비와 함께 흠뻑 젖어 들어. 마음이 폐허가 되었을 때 비로소 미자의 시는 시작되지.

미자에게 시가 고상한 예술적 세계를 의미했다면,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은 ‘교양은 어떻게 쌓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해볼 수도 있겠더라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예쁜 것만 담기 위해 노력했던 미자의 태도는 일종의 허영이었던 거야. 기품을 가진 사람이 되겠다는, 좋은 것 예쁜 것들로만 둘러 싸인 삶을 살겠다는 허구 말이야. 새의 노래, 하늘, 과일로 시를 쓰는 게 나쁜건 아냐. 하지만 그것들은 당장의 내 삶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공허해. 미자는 시상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고, 그 현실은 자연이나 고고한 대상이 아니라 미자가 위태롭게 발 붙이고 서있는 그녀의 세계라는 걸 깨닫지. 그 현실은 하늘만 쳐다보던 미자로 하여금 아름답지 않을지언정 낮은 것들을 보게 만들어. 삶 앞에서 겸손해질수밖에 없는 상황은 미자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그녀의 예술적 동력이 돼.

삶의 비극이 진정한 문학의 발판이 되는 이 아이러니를 생각하면, 수많은 훌륭한 예술가들과 그들의 삶을 떠올리게 돼. 그처럼 훌륭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가도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모순된 생각이 교차하거든. 허영으로 시작된 교양은 개인의 삶에 녹아들고 숙성하는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겸양이라는 모양새를 갖추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말하고 싶어. 허영은 반드시 겸양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고.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동경하는 마음으로 그 분야에 관심갖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허영으로 시작되더라도 괜찮아. 그게 나를 더 잘 알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으니까. 지적이고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이 관심을 만들고, 그 관심이 나도 모르는 새 진심이 되는 거지. 허영에서 멈추지만 않는다면, 더 깊이 파고들려는 애정은 오히려 겸양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첫걸음이 될거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덤덤히 울려퍼지는 미자의 시가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마음에 꾹 얹어놓는 듯한 감각을 연이도 꼭 느껴봤으면 해. 윤정희 배우의 엄청난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교양으로 시작해 이창동의 ⟨시⟩로 끝나버린 두서 없는 레터였지만, 그래도 좋을 만큼 후회 없는 관람이 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