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양 있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2025. 6. 11.

✦ 주영화

쉽게 읽히는 문화교양 뉴스레터, 일키. 우리가 추구하는 교양은 허례허식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삶과 그 삶들의 관계를 정의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 교양이 생기면 내 태도와 내가 속한 환경,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수준까지 바뀌거든. '교양 있다'는 말은 곧 '힘이 있다'는 말과 같지. 선민의식 아니냐고? 이 지적에 대한 해명은 잠시 미뤄두고, 교양 있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지 궁금한 연이를 위해 오늘 레터를 열어볼게.

〈씨너스: 죄인들〉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며칠 전 극장에서 ⟨씨너스: 죄인들⟩이라는 영화를 봤어. 1932년 인종차별이 당연시되던 미국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한 짬뽕 액션물이었지. 블루스를 사랑하는 흑인 소년 '새미'는 물려받은 기타를 둘러메고 쌍둥이 사촌 형 '스모크'와 '스택'이 오픈하는 술집에서 데뷔 무대를 올려. 황홀했던 공연도 잠시, 새미의 음악이 백인 흡혈귀를 매혹하는 바람에 오픈 파티는 끔찍한 학살 현장으로 뒤바뀌지.

피 칠갑을 한 채 도망친 새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마을 교회에 도착해. 이제 그만 음악을 포기하고 남은 생을 신에게 의탁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갈등하던 새미는 결국 고향을 버리고 블루스를 택하지. 그렇게 60년이 흘러, 죽지 않고 흡혈귀로 살아가던 스택을 자신의 블루스 클럽에서 다시 만나게 돼.

피 칠갑을 한 채 교회로 들어서는 새미. (출처-네이버 영화)

스택이 새미에게 뱀파이어가 되면 계속 연주하고 투어를 다니며 영생을 살 수 있다고 꾀지만, 새미는 삶을 충분히 즐겼다며 거절하지. 스택은 더는 설득하지 않고 단지 그 시절 블루스를 들려달라고 부탁해. 60년 전 고물차를 타고 목화밭을 달리며 새미가 불렀던 노래를 다시 들으며 스택은 향수에 젖어 들어. 200달러로 값을 치르고 떠나는 스택의 뒷모습을 향해 새미는 이렇게 묻지.

"일주일에 한 번은 그날 밤의 악몽을 떠올리며 깨. 그래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어. 형도 그래?"

스택은 답해.

"물론. 내 형제와 태양을 봤던 마지막 날이니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자유로웠어."

⟨씨너스: 죄인들⟩은 스릴러, 호러, 로드무비, 음악, 액션 장르를 넘나들어. 상식을 벗어나는 전개가 이어지면서 나도 어느 지점부터는 이해하기를 멈추고 영화가 보여주는 광기를 즐기게 되더라. 후반부로 들어선 이야기가 우아하게 매듭 지어지는 순간에는 진한 감동까지 느껴졌어. 도로 위를 폭주하던 트럭이 물류센터에 알맞게 도착해서 화물을 고스란히 내려놓은 느낌이랄까. 이야기를 끌어온 힘과 메시지의 깊이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결말이었지.

고물차를 타고 목화밭을 달리는 새미, 스모크, 스택 그리고 주정뱅이 할아버지. (출처-네이버 영화)

이 영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교양 있는 삶에 관해 얘기해. 첫째는 새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불가해한 하룻밤과 그 밤을 평생에 걸쳐 받아들인 새미의 태도를 통해, 둘째는 이상한 짬뽕물 영화에서 기어코 인생의 진리를 건져 올리는 관객의 집념을 통해서지. 이 영화는 작품 내적으로도 삶의 본질에 관해 말하고, 외적으로도 ‘영화를 본다’는 관객의 경험을 통해 삶에 교양을 불어넣는 셈이야.

평화로웠던 고향 마을을 피바다로 만들고, 사랑했던 가족과 이웃을 모조리 앗아간 괴물 앞에서도 새미는 두려워하지 않았어. 괴물을 증오하지도 않았지. 되레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눠. 소년 시절의 자원을 몽땅 잃은 새미가 불행을 삶의 동반자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그건 바로 삶을 비관하지 않고 제3자의 눈으로 관망할 수 있는 예술가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야. 불행까지도 영감의 불쏘시개로 사용할 줄 아는 영리한 태도만 지킨다면 고난과 시련이야 인생이라는 작품의 소재거리에 불과하지. 블루스계의 거장이 된 새미가 최악의 밤을 '최고의 날'로 정의한 것처럼 말이야.

✦ ✦ ✦

삶과 예술은 닮았어. 무용한 주제에 값비싸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 단순하고, 천박하다고 손가락질받으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눈부시게 아름답지. 예술(삶)에 깊이 중독되는 것도, 예술(삶)적인 모든 것을 냉소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딱 두 가지, 예술(삶)에 푹 빠질 수 있는 천진함과 그런 자신을 시의적절하게 건져낼 줄 아는 현명함이야. 이 두 가지가 바로 '교양 있음'의 시작 아닐까.

최악의 밤이자 최고의 하루를 보내는 새미. (출처-네이버 영화)

나 역시 2시간 동안 이 영화에 푹 빠져 있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화 장면들을 곱씹다가 깨달았지. '이거 진짜 이상한 영화구나'라는 걸. 블루스와 힙합과 중국 무희와 발레리나가 떼거리로 섞여 나오질 않나, 긴장감 넘치는 호러 장면 중간중간에 웬 할아버지 캐릭터가 맥 빠지는 개그를 하질 않나, 나는 그런 장면을 떠올리며 어이없는 웃음을 피식 피식 짓지를 않나.

세상의 모든 작품을 내가 이해할 수는 없겠지. 모든 예술을 즐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받아들이고, 황당하더라도 그 의미를 파고들려고 하는 태도 역시 교양의 조건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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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예술)에 관해 진중하게 고민할 수 있다면 삶(예술) 역시 우리를 진중하게 대할 거야. 하물며 타인은 어떻겠니. 여기까지 읽은 연이라면 적어도 내가 가벼운 사람으로 느껴지지는 않겠지. 나 역시 연이 너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을 테고. 어때, 이 정도면 교양의 힘이 조금이나마 느껴졌을까?

영화를 보고 진지해져서 어떤 얘기라도 나누고 싶으면 언제든지 답장하기로 놀러 와. 나도 입을 근질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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