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어진다며 손은 왜 잡아

2025. 4. 30.

🎞️ 헤어진다며 손은 왜 잡아

✦ 주영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친구에게 썰을 풀거나 영화 줄거리를 설명할 때 우리는 당연한 듯 시간 순서대로 말해. 이걸 '선형적'이라고 불러. 단어 뜻 그대로 '선처럼 길게 일렬로 나아가는'이라는 의미야. 시간의 선형적 흐름은 물리법칙이어서 멈추거나 뒤로 돌릴 수 없어. 이 법칙에 따라 존재하는 우리는 자연스레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인식하지.

그런데, 우리 의식도 과연 선형적으로 흘러갈까? 끝내줬던 여름휴가를 곱씹거나 인생 영화의 명장면을 음미할 때면 우리 의식은 기억을 비선형적으로 제시해. 누군가와의 추억을 되짚을 때도 마찬가지야. 그때 갔던 카페에서 걔가 이런 말을 했는데. 이 부분이 좋았어. 다시 돌려볼까... 인식과 인지를 거쳐 기억이 된 사건이 무의식에서 잠자고 있다가, 어느 날 의식의 수면 위로 툭툭 튀어 오르지. 마치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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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영 중인 영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14년 차 커플 '알레'와 '알렉스'가 이별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을 담아내. 주변 지인에게 모범 커플로 불리는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헤어짐을 결심해. 두 사람은 "만남보다 헤어짐을 기념해야 한다"는 알레 아버지의 철학에 따라 장소를 고르고 초대 명단을 추리며 파티를 계획하지.

이별 파티라니, 무슨 엉뚱한 발상인가 싶지? 알레와 알렉스의 친구들도 두 사람의 아이디어를 듣고 황당한 표정을 지어. 심지어 "너네 결국 다시 만날 걸"이라며 초를 치지. 이별을 공언한 두 사람도 확신이 없는 듯해. 집에서 영화를 보며 소소하게 데이트하거나 연애 초기 영상을 발굴해 돌려보기도 하거든.

길을 걷는 '알렉스'

그런 그의 모습을 편집하는 '알레'. (출처-네이버 영화)

알레는 영화 제작자인 자기 직업을 살려 자신들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를 편집해. 실시간으로 편집되는 날것의 영상은 관객이 보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장면과 똑같아. 영화와 알레의 다큐멘터리가 화면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셈이야. 액자식 구성을 취하면서도 액자 틀을 깨는 비선형적 편집 스타일은 마치 사람이 추억을 회상하는 방식과 비슷해.

우리도 기억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생하고, 일시정지하고, 되감고, 건너뛰잖아. 이 과정에서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 지나간 것이라 여겼던 과거가 지금, 여기로 소환되면서 현재에 영향을 미치거든. 연애 초기 영상을 꺼내 본 알레는 14년 전 풋풋했던 서로를 오랜만에 떠올려. 알레는 예고된 작별을 무르기라도 할 작정으로 알렉스에게 "왜 나에게 키스하지 않아?"라고 내뱉지.

유대계 독일인으로 문학평론가이자 철학자였던 발터 벤야민(1892~1940).

20세기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억을 '지나간 것을 알아내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간 것이 비로소 현재화되는 매체'로 봤어.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특정 사건의 의미가 과거라는 이름으로 묻혀 있다가, 현재의 부름에 이끌려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거야.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갖추고서 말이지. 이 작업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라는 거야.

벤야민은 '지나간 것을 이미 소멸한 것으로 의식하면서 과거 당시에는 지나쳤던 것, 의식하지 못했던 귀중품을 찾아내는 순간은 구원의 순간'이라고 했어. 이 개념을 깊이 있게 다룬 책 ⟪발터 벤야민과 도시 산책자의 사유⟫에서는 기억이 선사하는 구원을 이렇게 해석해.

그동안 잊고 있던 지난 삶의 흔적이 과거라는 시간 지표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 회상하는 현재와 독특한 구도를 이루면서 동시적인 상이 된다. 회상은 과거에 들어 있는 "아직 보이지 않는 낯선 것"을 찾아내고 구원하는 작업이다. 이로써 이미 지나간 것, 지나간 행복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주인 노릇을 해보지 못한 삶, 우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한, 실제로 체험해볼 시간도 갖지 못했던 삶의 흔적들이 회상을 통해 현재화되면서 구원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알레와 알렉스는 이별을 준비하면서 그들의 관계를 기억의 맥락에서 되새겨. 이 과정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비선형적을 회상되고, 과거의 사건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돼. 우리는 흔히 선형적 시간의 흐름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얽힌 다층적 시공간을 살아가는 셈이야. 기억은 그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 현재를 더 깊이 있게 살아가는 방식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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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때우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 엉킨 몸으로 티비를 보고, 악몽에 시달리는 연인의 손을 다독이며 그의 주름진 미간을 펴는 일. 그런 일들이 몇십 년간 퇴적되어 만들어지는 단단한 기억의 지층. 고리타분하게 반복된 시간이 '기억'되는 순간,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그 기억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일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야.

알레와 알렉스의 이별 파티는 어떻게 마무리됐을까? 지나온 세월을 각자 추억하기보다 함께 기억하기를 선택한다면, 그들 앞에 놓인 건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될 테지. 지금 연이 곁에는 함께 기억을 산책할 사람이 있니?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심했던 인연과 오늘 하루 기억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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