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어리💌] 내가 똑똑한지 아는 방법, 주영화의 열세 번째 레터

2024. 10. 30.

주식 투자를 해본 연이라면 이번 이야기가 재밌을 거야. 이상적인 국가나 세계를 꿈꾸는 연이들은 흥미로운 고심에 빠질지도 모르지. 나는 오늘 연이 네가 얼마나 똑똑한지, 그리고 얼마나 용기 있는지 객관적으로 재볼 수 있는 한 실험에 관해 다룰 거거든.

앞서 이 글은 2020년 대학 입시 커뮤니티 '오르비'에 올라온 한 게시글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점을 밝힐게. 아래에 링크를 남겨둘 테니 해당 글을 먼저 정독하고 오면 좋겠지만, 길고 복잡해서 읽기 어려운 연이들은 내가 요약해서 알려줄 테니 걱정 말고!

🔗나는 투자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일까?

연이 너는 'Split or Steal' 게임에 대해 들어봤어? 2007년 영국에서 방영된 <Golden Balls>라는 TV쇼에 등장하는 게임이야. 규칙은 간단해. 두 사람이 상금을 놓고 '나누기(split)'와 '훔치기(steal)'가 적힌 금색 공 중 하나를 골라. 1) 둘 다 나누기를 고를 경우 각각 상금 절반을, 2) 둘 중 하나가 나누기를 고르고 하나가 훔치기를 고른 경우 후자가 상금 전부를, 3) 둘 다 훔치기를 고른 경우 누구도 상금을 가져갈 수 없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상대방이 어떤 공을 골랐는지는 오직 결과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지. 연이라면 어떻게 할래?

<Golden Balls>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갈색 셔츠의 남자가 'A'야.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이렇게 진행돼. A와 B가 대면해 무엇을 고를 것인지 대화를 나누는데, A는 "저는 무조건 훔치기를 고를 겁니다. 당신이 나누기를 고른다면 저는 획득한 상금을 당신과 절반씩 나누겠습니다"라고 선전포고해. 당황한 B가 "애초에 나눌 생각이라면 둘 다 나누기를 고르면 되지 않나요?"라고 되묻지만 A의 태도는 완강하지. A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B는 "남자가 두말하면 남자도 아니다"라는 으름장을 놓으며 결국 A의 뜻대로 나누기를 골라.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B는 약속대로 나누기를 골랐고, 훔치기를 고르겠다고 단언한 A는 놀랍게도 나누기를 선택했다는 것이 밝혀졌어. 결과적으로 A의 말대로 상금을 절반씩 나눈 셈이야. B는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말하지. "당신은 내가 본 인간 중 최악이에요!"

B가 A의 수에 놀아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A 입장에서는 둘 모두에게 최선인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을 알 수 있어. 사람이라면 서로 상금을 나누자고 합의했더라도 상대를 배신하고 돈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을 떨칠 수 없는 법이니까. A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변수를 제거하려고 했던 거지. 조금 다르게 말하면 A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거야.

궁금한 사람을 위한 유튜브 영상

자, 이제 오르비에서 진행된 실험에 관해 소개할게. 한 관리자가 커뮤니티 이용자를 대상으로 구글 폼을 뿌렸어.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지.

여러분은 0, 1, 2, 3, ..., 98, 99, 100 즉 0~100까지 정수 중 아무 숫자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기 참여한 모든 사람이 제출한 값들의 평균에 2/3를 곱한 값에 가장 가까운 값을 적어낸 분에게 30만 포인트를 드리겠습니다. 정답자가 여러 명이면 1/n로 나눠 지급하겠습니다.

잠깐 글을 멈추고 숫자 하나를 골라볼래? 연이라면 포인트를 얻기 위해 어떤 숫자를 고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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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 모두가 0부터 100까지 정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모든 사람이 제출한 값들의 평균'을 50으로 가정하는 것이 직관적일 거야. 여기서 생각을 멈추고 50을 고른 사람은 '0차원 추론자'에 해당돼.

50을 고른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추측한다면 '50 x 2/3'인 33.333...을 고르는 것이 타당하겠지. 그래서 33이나 34 중 하나를 고른 사람은 '1차원 추론자'야.

여기서 더 나아가 다수의 사람이 1차원까지는 추론했으리라 생각한 사람들은 '33 x 2/3'인 22를 고르겠지? 2차원까지만 도달한다면 3차원, 4차원을 고려하는 건 쉬워. 마지막까지 가서 n차원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참가자가 '0'을 골랐다고 추론해 '0'을 선택할 거야. 참가자들의 지능을 과대평가했다는 전제하에 모두가 포인트를 나눠 가질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인 셈이지.

그런데 말이야, 세상에 그런 똑똑이가 몇이나 되겠어? 보통 수준의 사람이라면 n차원에 접근하지 못할 텐데. 이 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포인트를 획득하기 위해 1차원 추론자가 제출한 33과 2차원 추론자 제출한 22 사이에서 고민할 거야. 참가자들의 수준과 그들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사람만이 승리할 수 있는 거지. 우승 숫자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24'였다고 해. 어때, 연이는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는 사람이니?

응답자의 도수분포는 아래와 같아. 확실히 50 이하에 많은 사람이 몰린 반면, 절대로 정답이 될 수 없는 67 이상의 값을 고른 참가자도 보여. 최대 숫자인 100에 2/3를 곱하면 66.66... 이기 때문이야. 룰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흥미가 없어서 아무 숫자나 대충 찍었거나, 단순히 그 숫자가 좋아서 골랐을 수도 있지. 아무튼 세상에는 우승을 노리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출처-오르비 'lacri'

'다른 사람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은 주식 투자로 돈을 벌 때 큰 도움이 돼. 기업의 재무제표를 분석해 큰 성장을 이룩할 가치주를 발굴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대중의 욕망을 읽어서 저점에 매수하고 고점에 매도하는 타이밍을 아는 것도 중요하잖아? 각종 밈코인 광풍에 탑승해 큰돈을 번 사람들의 행동 원리도 마찬가지야.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면 다차원적인 사고로 투자자들의 심리를 읽어내고 이를 이용한 사람이 게임에서 승리한 거지.

음… 애석하게도 나는 이런 쪽으로 현실 감각이 전무해. 이게 내 약점이라는 걸 잘 알아서 경제 뉴스며 주식 시장이며 어떻게든 챙겨보려고 노력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라는 사람과 잘 안 맞달까. 그런 내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앞선 도수분포표에서 '0'을 선택한 사람들이야. n차원까지 도달한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이성적일 수 없다는 결론도 쉽게 내릴 테지. 그렇다면 '0'이야말로 우승 숫자에서 가장 동떨어진 선택일 거야. 그럼에도 그들은 올곧게 '0'을 선택했어.

나는 여기에 새로운 가설을 세우려고 해. 바로 '순교자의 큰 그림' 이론이야.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자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표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0'을 선택했다는 내용이지. 앞서 모든 참가자가 '0'을 고르고 포인트를 나눠 갖는 것이 최선의 결과라는 말 기억해? 물론 포인트를 독차지하고 싶은 합리적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테지만, 세상에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를 끌어내려는 이상주의자도 있는 법이야. 어쩌면 포인트를 따지 못할 것을 알지만 가장 이상적인 숫자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도수분포표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보아라, n차원까지 도달했지만 합리적인 숫자가 아닌 이상적인 숫자를 택한 이상주의자들이 여기 있다!'

참가자들은 도수분포표와 자신이 고른 숫자를 비교하며 스스로 얼마나 똑똑한지 혹은 멍청한지 알았을 거야. 누군가는 쾌재를 불렀을 거고 누군가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어라라, 어떤 헛똑똑이들이 절대로 우승할 수 없는 숫자 '0'을 고른 것 역시 목격했을 거야. 그리고 생각하겠지. '이 바보들은 도대체 왜 '0'을 골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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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면,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혈투의 장이라면 아무리 선한 의지를 지니고 세상을 개혁하려는 인물도 금세 좌절했을 거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미래는 나만의 망상인데 뭐 하러 스스로 갉아먹으면서 이데아를 꿈꾸겠어? 하지만 같은 뜻을 품은 동료가 있다면 분명 어려운 길일지라도 힘을 낼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건 내 뜻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지.

'Split or Steal' 게임에서 둘 모두가 상금을 나눠 갖기 위해 전략을 행했던 A가 만약 이상주의자라면, 그리고 세상이 1:1 게임이 아닌 다 대 다의 복잡한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A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는 방송이라는 거대한 홍보 수단을 활용해 자신이 이상주의자임을 알리고,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누기'를 고르는 선의를 베풀겠다고 선제적으로 밝힐 거야. 설령 단판 게임에 져서 이를 본 다수의 시청자가 '역시 세상은 잔인해'라고 생각할지라도, 선의를 실천하는 그의 모습에 몇몇은 감화될 테지. 방송을 본 이상주의자들은 동료의 존재를 확인해 연대감을 느낄 거고, 좋은 미래에 관해 막연하게 생각하는 소시민들도 어쩌면 동조할 가능성이 생길 수 있어.

현실에 적용해볼까? 대한민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거대 양당의 증오 정치를 지적한 이탄희 전 의원은 22대 총선 출마 기회를 포기하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와 위성정당 방지법 도입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밝혔어. 일부를 발췌해서 알려주기 전에,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단지 오늘 이야기와 어울리는 사례라서 인용한다는 점을 꼭 알아주길 바라!

정치개혁의 핵심은 증오 정치의 판을 깨는 것입니다.

증오 정치는 반사이익 구조를 먹고 삽니다.

퇴행된 선거제로 다음 총선을 치르면 22대 국회는 거대 양당만 남는,

숨 막히는 반사이익 구조가 됩니다.

정치인들끼리 정권교체만 무한반복하면서 사람들의 삶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면

그런 정치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정치의 목적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이 전 의원이 '합리적'인 사람이었다면 적당히 민주당 텃밭에서 승리해 의원 자리를 지킨 뒤 국회에서 조금씩 세를 불리며 비전을 실현하려고 했을 거야. 하지만 그는 '이상적'인 사람이어서 의원도 뭣도 못 되는 수를 택했어. 대신 호소문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와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을 설파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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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종교를 믿지 않지만, 예수 역시 '0'을 선택한 이상주의자라고 봐. 몇십 년간 오래오래 살아서 복음을 전했으면 될 일을 굳이 3년 만에 십자가에 못 박혔던 이유는 자신이 죽어서도 신도들이 예수라는 이상주의자를 마음에 품고 그 뜻을 실천하며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야. 이 정도면 '순교자의 큰 그림' 이론에 대해 이해가 됐을까?

연이 네가 합리적인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이상주의자든, 옳고 그름은 없어. 그렇지만 게임 하나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니? 참고로 나는 처음에 33을 골랐다가 룰을 다시 읽은 뒤에야 n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0을 고른 사람들의 의도를 추측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이상론에 흥미를 느꼈지. 연이 너는 몇 차원의 사람일까? 너는 자신을 희생해 존재를 증명할 용기가 있는 사람일까? 궁금하다. 답장으로 알려주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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