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내리는 눈은 왠지 생경하게 느껴져. 겨울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마치 ‘아직 안 끝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금세 창 밖 풍경이 하얀 색으로 물들었어.

  '창작의 어머니는 마감'이라는 말이 있잖아. 주기적으로 레터를 쓰면서 그 말을 실감할 때가 많아. 마감이 있다는 건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미션이 주어진다는 거고, 그걸 해내기 위해 소모하는 에너지는 나의 한계를 넓히고 발전시켜주기도 해. 하지만 동시에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든다는 점에서 지옥을 선사하기도 하지. 마치 좀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애를 쓰고 있는 지금처럼 말야.

  레터를 쓰기 위해서라도 보통은 여러가지 인풋을 머리 속에 넣으려고 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여러 사정으로 잘 되지 않았어. 평소 같으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영화라도 꺼내 볼 텐데, 그것마저 별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더라고. 다 타버린 냄비의 바닥을 긁는 느낌이었달까. 마감은 점점 다가오는데, '아직 시간 있어' 라며 회피해버렸어. 어떻게 했냐고?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가도 마실 차를 우리러 간다거나, 동생이 말을 걸면 성심성의껏 대답하며 대화를 이어간다거나, 고양이 간식을 준다거나... 방법은 많지. 그러다 번뜩 떠오르는 다큐멘터리가 있었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10년>이야.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10년> 은 <이웃집 토토로>,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전설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다큐멘터리야. 일본의 방송사 NHK에서 10년간 미야자키 하야오를 따라다니며 스튜디오 지브리의 일상과 영화 <벼랑 위의 포뇨>를 만드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단순히 영화 제작기라기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창작자가 살아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해. 초반부에는 다큐 감독을 그나마 존중해주는 편이지만 뒤로 갈 수록 짜증을 내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곤 해서 재밌는 부분이 많아. 

 기대와는 달리, 다큐멘터리 속 그를 담은 풍경은 마치 아수라장 같아. 종이 더미에 파묻혀 그림을 그리다가 콘티 뭉치를 덩어리째 집어들어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곤 하지. "성가셔", "하기 싫어" 라는 말을 숨쉬듯 반복해. 다리를 떨고, 머리를 쥐어 뜯고, 입에는 담배를 물지 않은 때가 없지. 스토리 작가도, 조언을 하는 사람도 없어. 스스로 하나의 세계를 오롯이 만들어야 하는 사람. 그러다 문득 회피의 늪에 빠지곤 해.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질문을 되뇌이면서.

  재미있던 점은, 아무리 하야오라도 '뭘 위해서 하는가', '왜 하는가' 라는 질문을 끝없이 되뇌인다는 점이야. 이 과정에서 그는 처절하게 자신과 대결하며 발버둥치고, 카메라는 집요하게 그 싸움을 바라볼 뿐이야. 처음에는 찍는 사람도 괴롭지 않을까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감독이 잔인하다는 생각마저 들더라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있는 사람 앞에서 태평하게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는 것이 말이야. 

 사람들은 이미 충분한 명예를 얻었는데 왜 계속해서 일을 하는지 물었다고 해. "명성, 돈 따위는 아니에요" 라며 다큐멘터리 속 하야오는 '저주받은 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모든 인간이 살아오며 갖게 되는 꿈이나 이상은 저마다의 모순을 품고 있어.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군용 비행기에 감탄하는 것처럼,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고 있는 영화 또한, 정녕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어.

 우리가 열망하고 얻고자 하는 가치가 정말 중요한 것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판단할 수 있어. 모든 것이 쓸모 없다고 여겨질지라도 지금 당장은 알 수 없기에, 현실의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에 그저 몰두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하야오가 이야기 하는 '저주받은 꿈'이야.

 미야자키 하야오와 그가 이끄는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에 대한 또다른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꿈과 광기의 왕국>이야. 천재 감독 하야오의 '저주받은 꿈'은 광기에 사로잡힐 지경의 창작의 고통 속에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어. 물질이나 명예가 아니라, 꿈 그 자체를 동력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아닐까.

 하야오는 스토리보드를 그리며 동시에 이야기를 완성해. 그러니 그가 마무리 짓지 않으면 누구도 이야기의 결말을 알 수 없어. 그의 작업 전반은 결국, '어떻게 끝낼 것인가'의 과정이기도 한 거지. 스스로의 힘으로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는 다는 점을 무척 본받고 싶었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나를 움직이는 '꿈'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역시 앞으로 써 내려가며 깨달아야 하는 부분이겠지. 이런저런 고민과 스트레스로 한동안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는데, 마감에 쫓겨 써내려가는 이 시간이 오히려 나 자신과 대화하는 귀중한 기회가 된 것 같아. 하야오처럼 나이가 들어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